임진왜란 할복까지 생각했던 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그의 트라우마

임진왜란 할복까지 생각했던 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그의 트라우마



가토 기요마사에게 생긴 트라우마

정유재란이 다시 발발하고 왜군은 수륙병진 정책을 펼치며 조선을 침공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로 인해 좌절을 맞보게 됩니다.

이에 왜군은 전면적으로 후퇴를 하고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틀어박혀버렸습니다.

왜의 장수들은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철수 불가를 외쳤고 재북상 할 것을 독촉해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일본군 상당수가 여전히 조선 남부에 남아 있었고, 이들이 남아 있는 이상 전쟁을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이들을 모조리 격파해 이 전쟁을 끝내야겠다 결심합니다.

가토 기요마사

그중에서도 왜군에서 가장 용맹하기로 소문난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 왜성인 도산성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도산성은 일본의 조선 침략 거점인 부산과 매우 인접해 있어서 함락만 시킨다면 부산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었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사실상 좌절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공격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또한 가토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조선 조정에 치욕을 안겨준 인물로 그를 처단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실제 조선 조정은 고니시가 주둔하고 있던 순천 왜성과 가토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 왜성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다 울산 왜성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울산성 전투는 총 2차례에 걸쳐 벌어졌으며 그중 유명한 것이 1차 울산성 전투입니다.

1차 울산성 전투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 1만 1천 5백명과 부총병 양호와 제독 마귀가 이끄는 명나라군 3만 6천여명은 가토 기요마사가 1만 5천의 병력으로 주둔하고 있는 울산 왜성으로 향합니다.

1597년 음력 12월 23일 마침내 조명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귀, 이여매, 파새가 지휘하는 명군은 울산성 서북쪽으로 진군하여 왜군을 성내로 퇴각시켰고 경리 양호의 군대는 울산성의 외성 목책을 점령합니다.

이후 도산성은 조·명 연합군에게 그물같은 포위를 당해 성이 함락 진적까지 갔으나 왜군의  저항이 워낙 강해서 사상자가 속출하자 양호는 퇴각명령을 내립니다.

본격적인 공성전에서 조·명 연합군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왜성 공성을 진행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처지도 최악이었습니다.

도산성이 완공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 공격을 받다보니 성 안에 군수 물자의 비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태였으며 1만 5천의 왜군이 먹을 식량과 물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물이 성내에 1개도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식량도 식량이지만 물 없이는 사람이 살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사가 끝난지 얼마 안 되어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까지 상당수 남아 있어서 그들도 먹여 살려야 했던 왜군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왜군은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렸으며 궁여지책으로 말을 죽여 말고기를 먹었고, 더 시간이 지나서는갈증으로 인해 자신들의 오줌과 피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총사령관 가토 역시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천에 고인 물을 짜내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가토는 결사대를 조직해 울산 태화강에 식수를 조달하러 보냈지만 조명연합군에 의해 결사대를 보내는 족족 죽거나 포로로 잡혀버렸습니다.

아무리 가토라는 용장이 이끄는 왜군이었지만 배고프고 갈증에 시달리다보니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정도까지 이르자 왜군의 식량난은 최악의 상태였고 농성전의 핵심인 조총수에 한정하여 하루에 생쌀 한 홉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물이 없으니 생쌀을 씹어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고, 가토의 일본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결사 항전을 시작합니다.

할복까지 생각하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가토 기요마사는 할복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조명연합군의 목표가 가토가 있는 도산성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자신들의 성에만 있던 다른 왜장들이 다시 연합하여 6만 여명의 대병력으로 가토를 구원하러 갑니다.

이에 조·명 연합군도 공성군을 줄이고 주력 상당수를 일본 구원군과 맞서게 하였으나 역으로 왜군에 대패합니다.

이에 연합군 지휘부는 공성 포기와 퇴각을 결정하여, 10여 일에 걸친 전투는 최종적으로 왜군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조명 연합군은 무려 1만 5천여명의 전사가가 나왔고,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도 1만 5천명 중 500명만 살아 남았습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조명연합군은 다시한번 더 울산성을 공격하지만 2차 공격 역시 제1차 울산성 전투 당시 호된 맛을 본 가토 기요마사의 철저한 대비 태세로 인해 좌절되었고 군사를 물려 철수합니다.

1차 울산성 전투에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해 죽기 직전까지 갔던 가토기요마사.

여담에 그는 이때 너무나 괴로워 2번이나 자결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트라우마가 너무나 컸던 가토 기요마사.

정유재란에서 돌아온 그는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성을 축조하면서  성 내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다다미를 만들 때 된장에 조려 말린 토란, 고구마 줄기를 넣고 쪄서 유사시 비상 식량으로 쓸 수 있게 만듭니다.

축성의 달인이기도 했던 가토는 구마모토 성을 난공불락으로 만드는 것 외에도 외출할 때마다 유사시 즉시 까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을 챙겼다고도 합니다.

울산성에서 얼마나 호되게 당했으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가토기요마사와 그의 트라우마 관련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재미있으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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