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려했던 독립운동가 이재명(정치인과 아무 상관없음)

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려했던 독립운동가 이재명(정치인과 아무 상관없음)



매국노를 처단하려 했던 이재명 의사


매국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23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입니다. 이번에는 이재명 의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1887년 10월 16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난 이재명 의사는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 귀국합니다.

1909년 1월 초대 통감이었던 일제 강점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 암살을 계획했지만 동행한 순종의 안전을 염려한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다음을 기약하게 됩니다.

이완용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재명 의사는 매국노의 대표였던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심합니다.

명동성당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 오늘날의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래서 거사 당일 명동성당 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이완용을 기다립니다.

오전 11시 30분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을 발견한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찌릅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의사 사이를 막았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이완용은 폐가 뚫렸고 늑간동맥이 절단되어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절명하는 중상을 입습니다.

거사 이후 이재명 의사는 현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됩니다.

하지만 나쁜짓만 골라한 매국노의 생명력은 질겼습니다. 부상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는데요.

하필 이 당시 일본 외과계의 최고 권위자였던 기쿠치가 원장으로 부임해 있어 그의 치료를 받았고,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제1호였습니다.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기쿠치는 “외과 의술의 발전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 날 죽었다.” 라고 말했다 합니다.

이완용 살해미수로는 사형이 어렵다 판단한 일제는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인력거꾼 박원문을 빌미로 이재명 의사를 살해죄를 적용해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이에 이 의사는 일본 판사를 꾸짖으며 당당히 말합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번 죽은 것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하리라”

1910년 9월 30일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이재명 의사는 23살이라는 짦은 생을 마감합니다.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에게 입었던 상처로 인해 17년 동안 죽을때까지 폐렴을 고질병으로 달고 다니며 고생하다가 1926년 사망합니다. 이로인해 이재명 의사가 17년에 걸쳐 암살을 한 것이라는 말들도 있습니다.

이재명의사 의거터

이재명 의사가 형을 집행당한 후 시신은 어떻게 수습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발견이 되지 않고 있으며, 그의 무덤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습니다.

동명이인 정치인 이재명 보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를 더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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