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강의 소드마스터 – 실제 역사에 기록된 인물 척준경

한국사 최강의 소드마스터 – 실제 역사에 기록된 인물 척준경



한국사 최강의 소드마스터 척준경

소드마스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고려의 장수 척준경.

육룡이나르샤라는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척사광의 검법인 곡산검법 창시자로 척준경이라는 인물을 접했을겁니다.

드라마속 곡산검법은 허구지만, 척준경은 실존인물이며, 믿기힘든 그의 전적으로인해 드라마에서조차 인용을 한 것입니다.

뛰어난 전투력으로 여진을 정벌했던 척준경. 지고있던 싸움에도 그가 투입이 되면 전세가 역전이 되었던 불세출의 장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삼한의 제일검 척준경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척준경은 고려 중기때의 무신으로 본관은 곡산이며 황해도 곡주에서 척위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척준경은 윤관을 도와 동북9성을 개척한 인물로 윤관의 동북9성은 척준경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업적이었습니다. 여진정벌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척준경이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그의 명성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 있는 그의 믿을 수 없는 전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소드마스터 척준경의 전적

1104년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으나 그가 대패를 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무너졌습니다. 이때 척준경은 총사령관인 임간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고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습니다. 척준경의 용맹에 놀란 여진족이 추격을 멈춘사이 고려군은 정주성으로 귀환해서 완패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1107년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하여 항전하니 윤관이 어쩔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때 척준경이 갑옷과 방패하나만 주면 성문을 열겠다 말하였는데요. 이후 척준경은 석상 아래에서 갑옷과 방패를 들고 성벽을 올라가 적 추장과 장군들을 참살하였고, 그의 호언장담대로 성문을 열어 고려군이 석성을 함락시켰습니다.

1108년 1월 패퇴한 여진족이 가한촌 병목 오솔길로 고려군을 유인하여 윤관 및 부원수 오연총이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여진 수만 대군의 공격에 포위되었습니다. 이때 윤관은 동생에게 아버지를 부탁하고 병사 10명을 이끌고 윤관을 구출하러 갑니다. 지난 날 윤관에게 진 은혜를 갚기 위해 수만 대군을 뚫고 윤관을 구출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척준경이 베어 넘긴 적장의 수는 36급이었고, 전투 후 윤관이 눈물을 흘리며 척준경에게 “앞으로 나를 아버지라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1108년 1월 2만의 여진군이 고려가 주둔하고 있는 영주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도 척준경은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여진족 적장 19급을 참수하며 그들을 크게 무찌르고 개선했습니다.

1108년 2월 여진은 수만군을 동원해 고려군이 주둔한 웅주성 포위했습니다. 이때도 척준경이 홀로 일반 병사의 옷을 입고 창 하나를 든 채 성벽을 타고 내려와 포위망을 돌파했습니다. 이후 구원부대를 이끌고 하루에 한 개씩 여진의 관문을 깨고, 가로막는 적을 모조리 격파하며 웅주성으로 와서 여진의 본진으로 돌격해 여진군 격퇴시켜버렸습니다.

혼자의 힘이나, 결사대 조금을 이끌고 수만의 대군에 돌격을해서 승리를 한 척준경.

이후 여진족 사냥꾼들이 고려군 수비병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금나라에서는 자국민들에게 절대 국경을 넘지 말라는 명만 내리고 더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합니다. 고려에는 그들이 두려워했던 척준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 나열한 척준경의 믿기 힘든 이 전적들이 야사가 아닌 정사에 기록된 내용들이입니다. 거기다 후에 척준경이 반역열전에 들어간 인물이라 오히려 그의 전공이 축소가 된것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여진정벌 후 대신 반열에 오른 척준경은 외척 이자겸과 사돈을 맺고 정변을 일으켜 함께 대권을 장악하지만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져 인종의 편에 서서 이자겸을 체포하는 공을 세워 오늘날 총리에 해당하는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오르게됩니다.

이자겸의 수백명 반군이 척준경을 공격했지만, 혼자 나가서 반군을 모조리 진압하고 이자겸을 체포해 궁으로 끌고 왔다고 하니 또한번 척준경의 무쌍에 감탄을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지위에 오른것도 잠시. 탄핵을 받아 낙향을 하게 되는 척준경.

그동안 쌓은 공로가 있어서 인종은 그에게 더이상의 죄를 묻지 않았고, 척준경은 고향에서 병사하며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처음 시작은 여진을 정벌하며 고려를 위해 싸운 충신이었으나, 뒤에 이자겸과 함께 결탁해 궁궐을 범하고 전각을 불태워 역적열전에 기록이 됩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시대 편찬된 역사서로, 전대 고려의 장수인 척준경을 미화시킬 이유가 없었고, 거기다 충을 강조하는 조선시대에 역적열전에 오른 인물이다보니 오히려 척준경의 전공과 활약을 축소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축소된 기록도 믿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공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실제 전공 및 활약상이 궁금해집니다.

고려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장수인 척준경.

그가 처음처럼 고려를 위해서만 검을 들었다면 후대 평가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시지 않나요?

이것으로 한국사 최강 소드마스터 척준경에 대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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